"이야~ 이런 식으로 오빠한테 데이트 신청하는 거야? 엣헴~ 니 정성이 갸륵하니 간절한 너의 청을 받아들여 주마."
"허 참~ 이 오빠야. 길 가는 사람 붙잡고 물어봐. 다 내가 아깝다고 그럴걸? 내가 사실은 잠시 지상에 내려온 천사거든~ 그래서 오빠 생각해주는 건데... 허허~ 어이가 없네~ 솔직히 나 정도면 어딜 가도 절대 안 꿀리는 얼굴이거든? 중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 직전인 지금까지 나 좋다는 남자가 끊겼던 적이 한순간도 없었다. 흥!"
하긴 땡글이 미모가 최상급 미모에 속하는 건 사실이다. 그러니 땡글이를 맨처음 봤을 때 순간 넋이 나갔었지.
어쨌든 할 말이 없어진 나는 비굴모드로 태세전환했다.
"에이~ 농담이지이~ 사실 아까 나 감동 받아서 눈물날 뻔 했다요. 요기 안보여? 눈물자국? (속닥속닥)"
"어머~ 아저씨 누구신데 이러세요? 저 아세요?"
"땡글아.. 미안해... 내가 잘못했다."
와씨~ 따지고 보면 얘가 내여친은 아닌데 내가 왜 사과하고 있지?
"오빠가 뭘 잘못 했는데 나한테 미안해? 흥!"
아... 드디어 나왔다 여자들의 말싸움 필살기. '니가 뭘 잘못했는지 말하라 신공'
이 극강의 무공 앞에선 그 어떤 대답을 해도 필패는 숙명이었다. 최후 결정타인 '오빤 아직 오빠 잘못을 모르고 있어 14단 콤보펀치가'까지 기다리고 있을 것이 뻔하니 말이다.
삼전도에서 청 황제 홍타이지에게 삼배구고두례를 올렸던 인조 비슷하게, 나는 땡글이에게 복종과 충성을 맹약하며 싹싹 비는 수 밖엔 없다는 사실을 나는 잘 알고 있었다. 근데 여친도 아닌 애한테 내가 진짜 왜 이러고 있나? 자괴감이 느껴진다.
"괜히 거들먹거린 것부터시작해서 그냥 다 미안... 아~! 춥지? 저기 슈퍼에 가서 따끈한 캔커피라도 사올까?"
"칫.. 됐네요... 뭐 캔커피 말고, 조금만 더 가면 새로 생긴 커피 테이크 아웃 가게가 있는데, 거기서 마끼아또라도 사주면 기분 풀릴지도 모르겠다."
"어이쿠, 아씨 마님.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흥! 통 큰 내가 참는다. 오빠~"
... 솔까말... 통은 내가 더 큰 것 같다...
"그래.. 고맙~ 고맙~"
"오빠두 그 날 뭐 할지 생각 좀 해놓고 있어~"
이렇게 이 날은 지나갔다. 그리고 이 때는 몰랐다. 24일에 벌어질 일을...
Ⅵ)
운명의 그날. 오늘은 걍 전직원이 칼퇴하는 날이다. 나도 퇴근시간 되자마자 바로 컴퓨터 종료하고 빛의 속력으로 짐을 쌌다.
아. 땡글이한테 줄 선물도 확인하고.. 흠~ 잘 챙겼네.
땡글이 ㅓㄴ물은 그렇게 노래 부르던 에스티로더 갈색병에 든 아이크림인지 뭔지였다.
"오빠, 나 그거 사죠. 사죠. 사죠. 그게 뭔지 알지?"
"그만 좀 해라. 세뇌되겠네. 너 그 회사 영업사원이냐?"
그리고 아직 주름 걱정할 나이도 아니구만, 무슨 아이크림이냐고 했더니 탱탱할 때부터 미리 관리해야 된다나? 뭐라나?
"그리고 그거 크기도 작아. 오빠~ 얼마 안해."
얼마 안한다기에 가격이 얼마 안한다는 줄 알았지. 크기가 얼마 안한다는 말인 줄 몰랐다.
결제하는데 통수 맞았다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내 선물은 뭐냐고 물었더니
"비이~밀. ㅋㅋㅋ"
이런다. 분명히 아주 저렴한 선물이리라. 아직 학생인데 무슨 큰 걸 바라겠어?
어쨌든 약속 장소에서 만나서 축제 분위기를 즐겼다. 하지만 사람들 바글바글한 번화가를 걷는 것도 고역이었고 코피나 한잔 하려해도 빈자리 있는 카페가 한군데도 없었다. 커피 가격이 평소의 2배인데 말이다.
뉴스에선 역대 최악의 불황이라는데 다 뻥인 것 같다.
결국 걷다가 지친 우리는 특단의 조치를 내렸다.
땡글이는 부모님과 같이 사는 터라 자기집에선 나랑 같이 못놀지만, 나는 혼자 사는 처지라서 그냥 케이크랑 먹을 거 조금, 와인 한 병 사가지고 내 자취방에서 닌텐도나 하며 놀기로 했다.
우여곡적 끝에 마트에서 와인 하나랑 맥주 몇 캔과 크래커, 치즈를 샀고 제과점에서 산타 영감님과 열정 페이에 시달리는 루돌프 알바생 장식이 있는 케이크를 샀다.
택시 겨우 잡아타고 집으로 가는 길이 지옥에서 극락으로 가는 길처럼 느껴졌다.
드디어 My Sweet Home에 도착했다.
"오~ 여기가 오빠가 사는 데구나. 난 쓰레기 더ㅣ에 홀아비 냄새 풀풀 나는 방을 상상했는데, 의외로 깨끗하네. 사실 여자인 내 방보다도 더 깨끗하다. ㅋㅋ"
"에구~ 나 깔끔한 거 몰랐쪄? 보일러 켤게. 바닥 따뜻해질 때까지 이불 좀 덮어쓰고 있어."
땡글이는 이불 속으로 쏙 들어가더니 이불에 코를 대고 킁킁거린다.
그 모습이 꼭 아기 강아지처럼 앙증맞다.
"오빠 냄새 난다."
"나한테 냄새 나? 향수는 안 뿌려도 깨끗하게 씻고는 다니는데..."
"나쁜 냄새 아니야. 그냥 오빠 특유의 냄새가 있어. 절대 싫은 냄새는 아니니까 마음에 담아두지는 마. ㅋ"
냄새 이야기가 나오니 예전 추억이 다시 생각난다. 예전에 헤어졌던 그녀는 내 냄새를 아직 기억하고 있을까?
그렇게 잠깐 딴 생각을 하다가 현재 내 방에는 땡글이가 있음을 다시 번뜩 떠올리고 정신 차린 후
일단 손을 씻고 밥상을 깔았다. 땡글이는 이불을 뒤집어 쓰고 그 새 리모컨을 찾아 내어서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고 있었다.
크래커 위에 치즈를 올려놓고 접시에 담아 상 위에 올려 놓았다.
캔맥주는 우선 냉장고에 넣고, 케이크는 포장 박스에서 깨내어 밥상 위에 올렸다. 찬장에서 와인잔 2개를 꺼내어놓고나니 준비가 얼추 끝났다.
"자! 이제 파뤼 타임이다. 땡글아!"
라고 하자 땡글이도 이불 속에서 나오더니
"이예~! 메리 크리스마스 앤 해피 뉴 이어~!"라고 하며 앉은 채로 정체를 알 수 없는 춤을 덩실덩실 추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