Ⅰ)
흰구름 몇 조각이 떠다니는 가을 파란 하늘.. 이른 오후...
토요일인데도 직장 업무가 있어서 오전에 회사에 나갔다가 생각보다 일이 빨리 끝나 일찍 귀가하는 중이다. 주말에 자는 늦잠만큼 꿀맛 나는 피로회복제도 없는데, 아침 일찍부터 무슨 푸닥거리인지...
에라, 잠도 다 깬 거 집에 가서 목욕가방 챙기고 사우나나 가야겠다. 그다음엔 캔맥주 몇 개 사서 케이블에서 해주는 영화나 봐야겠다. 이렇게 생각하며 집으로 걸어가는 중이다. 월급부터 시작해서 마음에 드는 구석이 하나도 없는 회사. 집에서 걸어서 출퇴근이 가능하다는 게 유일한 장점이다.
Ⅱ)
갑자기 바람이 분다. 길가에 쌓인 낙엽들과 흙먼지가 함께 날린다. 눈과 코에 먼지가 들어갈까 나도 모르게 얼굴이 찌푸려진다.
나는 가을이 참 좋다. 분위기니 낭만이니 하는 낯 간지러운 이유 때문에 이 계절이 좋은 건 아니다. 적당히 쌀쌀한 기온, 딱 상쾌한 습도는 내가 생존(?)하기에 최적의 조건이다. 그리고 마른 낙엽을 밟을 때 나는 바스락 소리가 들릴 때마다 왠지 모르게 스트레스가 풀리는 듯한 통쾌함도 느낄 수 있는 것도 마음에 든다.
잡생각을 하다 보니 이제 10분만 걸으면 내가 자취하는 집인 지점을 통과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객지에서 혼자 산 게 벌써 십수 년째다. 그 사이 몇 번의 이사를 하고, 직장도 옮기고... 또 뭐 있더라? 아. 그래... 연애... 이 생각에 미치자 쓴웃음이 나온다.
이 동네로 이사온지 3년째, 늘 똑같은 동네 골목 풍경, 길가에 서서 무슨 작당모의를 하는 듯 수군대는 아줌마들, 못쓰는 가전제품이나 고장 난 컴퓨터를 산다고 작은 트럭을 몰며 골목을 누비는 아저씨...
동네 건어물 가게를 지날 때마다 풍기는 마른오징어 냄새..
특별할 것도 없는 새털 같이 많은 그저 그런 날 중 하나일 뿐이다.
Ⅲ)
그러고 있을 무렵 어떤 젊은 여자가 저기 앞에서 나를 향해 걸어오고 있다. 갈색 머리에 연분홍색 니트 같은 것과 무릎 조금 올라오는 나팔꽃처럼 생긴 베이지색 주름치마를 입고 있었고 다라는 가늘고 곧게 생겼다.
점점 내 앞으로 다가오자 비로소 얼굴도 자세히 보이기 시작한다.
땡그란 귀여운 눈매가 맨 처음 내 눈에 와서 박힌다.
(1+√5)/2≒1.618... 황금비처럼 전체적으로 균형 잡힌 미인상이다.
<이 동네에 저런 애가 살았나? 새로 이사 왔나? 원래 살고 있었나?>
<뉘 집 딸내미인지 예쁘게 생겼네> 하며 넋 놓고 쳐다보며 지나가다가 비켜지나 간다는 게 그만 타이밍을 놓쳐 톡 부딪히고 만다.
그 충격(?)으로 내 가을점퍼 주머니에 있던 폰이 바닥에 떨어지고 그 귀요미 눈매녀가 들고 있던 폰도 거의 동시에 그녀의 손에서 바닥으로 떨어졌다.
"엄마야!"
"어쿠!"
그리고 바닥에 떨어진 폰을 얼른 주워 액정부터 확인했다.
휴~ 다행스럽게 액정을 멀쩡했다. 24개월 약정 끼고 최신형으로 바꾼 지 겨우 한 달 됐는데 액정이 나갔다면 내 멘탈도 같이 나갔을 거다.
"죄송합니다." 서로 사과하며 후다닥 폰을 줍고 총총걸음으로 각자 가던 길을 가려던 그 순간!
그녀에게서 난 향기가 바람을 타고 내 콧속으로 들어왔다.
'그 냄새다!'
Ⅳ)
냄새에는 참 신기하고 강력한 기억 소환의 힘이 있다.
정말 까맣게 잊고 산 기억, 깊고 깜깜한 기억의 저장 창고 구석탱이에 버려두었던 조각난 기억들도 어떤 특정한 냄새를 맡는 순간 원상복구 되면서 기억의 지평선 위로 떠오른다.
그 냄새... 아니 그 향기로운 무언가를 인지하는 순간, 갑자기 아련하게 잊혀진 전설의 세계로 들어가는 기분이 든다. 그리고 가슴에 큰 구멍이 난 것처럼 무언가가 반사적으로 저미어 온다.
이 익숙한 듯한 냄새의 정체를 알아차리는 덴 긴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한 때 정말 사랑했던 이... 내가 독실한 신앙심으로 추앙했던 여신.. 내 종교는 그녀교였고, 나의 구세주는 그녀였다 천 가지로 변화하는 다채로운 표정 중에 사랑스럽지 않았던 표정은 한 가지도 없었으며 조금 하이톤의 목소리는 나에겐 천사의 노래였고 그녀의 눈은 내 영혼의 블랙홀이었다.
그랬다. 내가 낼 수 있는 빛을 한 줄기도 남기지 않고 빨아들여 버린 그녀는 나의 모든 것이었고 내 영혼의 소유권은 오로지 그녀만이 주장할 수 있었다.
하지만, 사랑의 깊이만큼 모든 연애놀음이 끝난 후 찾아오는 슬픔과 상실감은 바닥이 보이지 않는 심해처럼 깊고 깊었다.
무거운 돌덩이를 몸에 묶고 바다 한가운데로 던져진 내가 돌덩이를 벗어던지고 겨우 다시 숨을 쉴 수 있게 될 때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그 기간 동안은 그저 폐인처럼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어쨌든 시간은 약이 맞았다. 시간이 흐르며 상처는 아물어 갔고, 죽어도 잊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소설책 몇 권 분량의 수 많았던 추억 들고 점차 희미해져 갔고 그녀의 얼굴도 가물가물해져 갔다.
하지만 우연히 스쳐 지나며 맡게 된 그 향기는 그때의 모든 기억, 가령 사진처럼 머릿 속에 머릿 속에 남는 순간, 동영상처러 남아있는 예쁜 표정의 그녀 얼굴과 그 때 그녀가 했던 말.. 이 모든 걸 다시 생각나게 하기에 충분히 강렬했다.
그 향기는 그녀와 첫 키스를 할 때 그녀의 목덜미에서 났던 향기이며, 내 어깨에 기대어 도롱도롱 잠들었을 때, 춘천으로 여행 갔을 때 어느 모텔 침대 위에서 서로 맨살 비비며 해가 뜰 때까지 만리장성을 쌓을 때 그녀의 온몸 구석구석에서 났던 향기였다.
어째 되었건 이젠 더 이상 마음 두지 않기로 한 과거... 지금은 그저 쓴웃음거리의 에피소드일 뿐이다.
걷다 보니 어느덧 자취집까지 왔고 열쇠로 문을 열고 내 보금자리로 들어갔다. 습관적으로 폰을 꺼내 화면을 켜고 몇 시인지 확인해 보았다. 2시 35분... 그런데, 폰 배경화면이 달라져 있다!
어떻게 된 일이지? 내 폰 모델에 색깔도 화이트 맞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