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728x90

짧은 글들/촉촉한 아이

촉촉한 아이 011 지금은 1998년, 내년 12월에 지구가 망한다고 호들갑 떠는 사람들이 많다만, 나는 믿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역사를 좋아해 역사 관련 서적을 많이 읽어본 나는 과거로부터 종말 이야기는 수도 없이 나왔지만 진짜 종말이 온 적은 한 번도 없었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세상이 망하면 절대 안되는 이유도 있다. 눈이 촉촉한 그 아이 소현이... 감히 말하건데 그 아이가 내 첫사랑이다. 그 아이에게 고백 한 번 못 해봤는데, 추억 하나 못 만들어봤는데 세상이 망하는 건 내가 결코 용납 못 한다. 나는 학교에 가서 소현이에게 어제 초등학교 졸업 앨범을 찾아봤다고 말했다. 거기서 나온 너의 사진을 보았노라고... 소현이는 나에게 우리 초등학생 때 아이들이 자주 갔던 문방구에 대해 말했다. 나도 거기는 잘 .. 더보기
촉촉한 아이 010 소현이가 침대에 엎드린 채로 나를 보며 말했다. "근데 우리가 고등학생 때 일 기억나?" "어떤 일?" "그냥 이것 저것 여러가지... 난 잘 기억이 안 나서 그래." "아~ 소현이 어쩌나... 아직 그럴 나이는 아닌데..." "푸핫! 야! 나 치매 아니야~! ㅋㅋㅋ" 소현이는 웃으면서 내 맨살을 찰싹 찰싹 때렸다. 안 아플 줄 알았는데, 손이 매웠다. 얘 고등학생 땐 힘이 없었는데, 세월이 소현이의 파워를 강화시켰나보다. "하하. 농담 농담. 아야야~ 기억 나지. 뭐 지금 와서 하는 말이지만, 네가 나한텐 첫사랑이었어." 그 땐 그렇게 용기가 안나서 못했던 고백이었는데 지금은 아무런 용기도 필요 없이 첫사랑이었다는 말이 잘만 나왔다. 소현이는 눈이 동그래졌다. "그래? 난 전혀 눈치 못 챘는데... 피.. 더보기
촉촉한 아이 009 모텔에 들어간 후, 나는 우선 소현이를 침대에 최대한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리고 나서 나도 침대 한 모서리에 좀 앉아서 숨을 골랐다. 일단 숨 좀 쉬고 이야기 하자. 후우~ 헥헥~ 소현이를 여기에 두고 나 혼자 집에 갈까? 나도 여기서 잘까? 모텔 TV를 켜놓고 화면은 보고 있지만 저 고민을 하고 있을 때, 소현이가 갑자기 뒤에서 나를 확 껴안았다. "야! 너 나 두고 튈려고 그랬지? 어딜 가냐? 오랜만에 만났... 여기서 자고 가!" 라면서 침대 시트를 자기 손으로 팡팡 때렸다. 여기가 자기 집 침대라고 착각하는 건가? 어쨌든 소현이 향기가 내 코에 닿았다. 그 냄새 분자가 내 뇌 깊숙한 어딘가를 자극했나보다. 나도 모르게 수컷의 본능이 폭발하려고 하고 있다. 마침 그 찰나 소현이가 내 귀에 숨결을 불.. 더보기
촉촉한 아이 008 그렇게 소현이와 맥주 몇 몇 마시다 보니 시간은 어느덧 자정을 넘겨버렸다. 소현이의 말로는 자기는 이렇게 빨리 안 취하는데 날 만나 너무 반가워서 그런지 오늘 따라 많이 취하는 것 같다고 했다. 그리고 다음을 기약하며 자리에서 일어서는데 소현이는 그만 다리에 힘이 풀리면서 꽈당 넘어져버렸다. 꽤 소리가 크게 났는데도 아픈 것도 잘 모르는 것 같았다. 얘 집도 모르는데 어떻게 바래다주나 싶었다. 내 최초 계획은 이러했다. 우선 택시를 잡아서 같이 얘 집까지 직접 모셔준 다음에 난 혼자 다시 택시 타고 내 집에 가는 것이었다, 요즘 같이 미친 놈 많은 세상에 이렇게 눈이 촉촉하게 예쁜 여자애를 혼자 보낼 순 없었다. 우린 맥주집을 나섰고 나는 소현이를 부축하고 있었다. 소현이에게 집이 어디냐고 물어봤으나 ".. 더보기
촉촉한 아이 007 커피숍 창가에 자릴 잡은 우리는 아무 거나 시켜놓고 (아마 라떼였던 것 같다. 나 때 이이가 하려면 라떼가 적격이지.) 어떻게 지냈는지 서로 물어봤다. "휘야. 어떻게 지내? 결혼은 했어?" "아니, 나 이 나이 먹도록 아직 솔로야. 넌, 결혼 했겠지? 애는 몇명이야?" "하하.. 나? 사실 나 돌싱이야. 한번 다녀왔지. 애는 다행인 건지 모르겠다만 없어." "헐~ 아니.. 왜? 앗, 오랜만에 만나서 아픈 것부터 물어보면 안 되지." "에이~ 뭐 어때? 아픈 거 예엣날에 다 나았어. 넌 무슨 일 해? 스타일 딱 보니까 사무직?" "하하. 눈썰미 여전하네. 응. 나 그냥 평범한 회사원이야. 어휴~ 이제 뭐 무슨 거창한 미래 같은 것도 없다야. 퇴직하고 치킨집 차리고 그러다 망하고 그러지만 않았으면 좋겠다... 더보기
촉촉한 아이 006 그 여자... 아니 그 아이가 눈이 동그래진 채로 나에게 물었다. "너.. 너 혹시 체우ㅣ...(체위라고 말하려고 했었다. 말하다 말았지만 분명 들었다. 고딩 때 내 별명... 아 진짜... ㅠㅠ 눈물이 난다. 소현이가 맞다는 것을 다시 확인하게 되어 눈물이 났고 내가 싫어하던 별명이라 또 한번 눈물이 났다.) 압! 채휘! 휘 맞지? 휘야!" 난 말도 못 할 정도로 반가워서 정말이지 현실감이 사라졌다. 반 쯤은 꿈꾸고 있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내 아득해진 정신보다 정신을 더 똑바로 차린 물질적인 내 입이 먼저 반응했다. "응! 나 채휘야! 와~ 이게 알마만이야?" "정말~ 우리 고등학교 졸업하고 처음인가? 근데 너... 나 어떻게 알아봤어? 내 얼굴 많이 폭샥 늙었을텐데..." 그 아이는 자기 얼굴을 매.. 더보기
촉촉한 아이 005 지금 현재 나 한국식 나이 43세 얼마 전 개정된 법으로 한면 41세 몇개월인 나는 25년 전 한국식 나이 18세 때의 과거 회상에 빠져 있다가 전철 안내 방송을 듣고 정신이 다시 돌아왔다. 인간이란 딴 생각에 빠져있다가도 자기와 연관된 정보가 감각기관으로 인지되면 귀신 같이 알아차린다. 아무리 시끄러운 환경에서도 자기 욕하는 소리는 잘도 들리는 것도 그러한 이치이다. 인간은 온몸이 센서이고 그 성능은 우리가 생각하는 수준을 아득히 상회한다고 하니, 정말 갑자기 여러분들의 귀가 가렵다면 의심해보자. 어디선가 정말 자기 욕을 하고 있을 지도 모른다. 욕 먹고 살만큼 나쁘게 살지는 않았다고 자부도 하지 말자. 자기도 모르게 저지른 무수한 실수와 민폐도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그리고 혹시 아는가? 욕이 아니.. 더보기
촉촉한 아이 004 집에 가서 교복도 벗지 않고 초등학교 졸업앨범을 찾아 보았다. 꽤 오랜만에 책장 구석탱이에서 꺼내는 것이라 꺼낼 때 먼지가 앨범 윗부분에서 폴폴 피어올랐다. 시간날 때 청소 좀 해야지... 몰론 오늘 안에 까먹고 안 할 거지만.. ㅋㅋㅋ 내가 6학년 때 1반이었는데 그 땐 우리 반 아니었고, 우리 반이었으면 기억할테니... 계속 뒤적이다 보니 5반 페이지에서 김소현이라는 이름이 나왔다. 여자애들은 조금만 커도 얼굴이 휙휙 달라지는 경우도 많던데, 얘는 별 달라진 게 없는 것 같누~ 초등학교 6년 내내 같은 반이었던 적은 없는 것 같다. 아마 복도에서 지나가다가 몇 번은 마주쳤기에 낯이 익었나보다. 앨범을 덮고 저녁을 먹고나서 하늘이 어둑어둑해졌을 무렵 TV를 보고 있는데, 분명 화면 속 사람들은 내 눈을.. 더보기

728x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