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식네 가족이 구공산에 갔다가 다시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해가 뉘엇뉘엇 지고 있는 저녁의 끝무렵에 반찬거리와 생필품을 사기 위해 동네 시장으로 향했다. 역시 지방이라 그런지 반찬 가게에서 파는 반찬도 양도 서울에 비해 푸짐하면서 가격도 저렴한 편이이었기 때문에 오늘은 냉장고를 꽉꽉 채울 요량으로 룰루랄라 걸어가고 있었다. 효미는 피카춥스가 먹고 싶다고 아빠 현식에게 사달라고 했다. 서울에 있는 친한 친구인 혜리가 생각나서, 전에 혜리가 효미에게 주었던 피카춥스 딸리크림맛이 먹고 싶어졌던 것이었다.
그렇게 걸어가고 있는데, 앞에서 누군가 한 무리의 일행이 현식과 나리에게 아는 척을 했다. 가만히 보니까 푸닭커리의 새로운 단골 중 하나인 박서진씨와 윤수현씨 그리고 초등학교 3학년 아들 박호준이었다. 박서진씨 가족은 아파트 단지 상가에 있는 커피숍을 운영하고 있었다.
"어~ 안녕하세요. 푸닭커리 사장님!"
박서진씨가 현식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허허. 사장님, 시장에는 웬일로 나오셨어요? 저희는 산에 갔다가 장 보러 나왔습니다."
"저희도 아들녀석이 튀김어묵이랑 떡볶이가 먹고 싶다고 해서 나왔으예. 시장 입구에 파는 노점상이 맛있게 잘 하거든예."
구수한 사투리를 쓰는 박서진씨는 무표정일 때는 우락부락하게 생겼는데, 보통 거의 대부분은 늘 웃는 얼굴로 사람을 대했다. 그래서 눈가와 입가에 '미소 주름'이라고 해야할까? 잘 웃는 사람에게서 흔히 보이는 주름이 진하게 새겨져 있었다. 그런 주름이기 때문일까? 박서진씨의 주름은 보기 흉하지 않았다.
사람은 나이가 들면 자기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말은 사실이다. 주름 하나하나에도 자기가 살아온 방식과 성격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법이다. 마치 선사시대 사람들이 동굴 벽에 새겨놓은 그림처럼 말이다.
박서진씨 옆에 있는 와이프 윤수현씨도 이들에게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사장님. 나리씨. 어느 산에 다녀오셨어요?"
나리가 대답했다.
"네, 저희는 구공산 다녀왔어요. 거기서 박사바위였나? 돌부처도 보고 효미는 소원도 빌고 그랬어요. 호홋"
"그랬구나. 거기 경치 좋은데, 나리씨는 고향이 서울이라서 구공산 박사바위는 처음이시죠?"
"네, 처음인데 진짜 경치는 좋더라고요."
"근데 나리씨, 아직 20대죠? 어머~ 부럽다. 나는 이제 다 늙었는데... 에휴"
윤수현씨가 한숨 쉬자 나리가 대답했다.
"아녜요. 사모님.. 아니, 언니~ 언니 아직 젊으세요. 피부도 저보다 더 좋으신 것 같은데요."
그 말을 듣자 윤수현씨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에이~ 무슨~ 그래도 기분은 좋네요.. 오호호"
하고 웃으면서 말했다.
윤수현씨는 갸름한 얼굴형에 쌍꺼풀이 없고 크지는 않지만, 눈동자가 아주 까맣고 맑은 예쁜 눈을 가지고 있었다. 연예인으로 치면 한예리씨나 김고은씨와 이미지가 비슷하다고나 할까? 그런 매력을 가진 인물이었다.
그리고 아들 호준이는 아빠를 메인으로 하면서 엄마를 서브로 해서 생긴 얼굴이라고나 할까? 엄마, 아빠를 모두 닮은 외모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호준이는 오늘 처음 본 효미에게 관심이 생긴 듯한 표정을 지었다. 물론 이건 어른들은 서로 이야기한다고 눈치 채지는 못했다. 다만 눈치 빠른 효미만 '쟤가 나한테 왜 저런 표정을 짓지?'라고 느꼈을 뿐이었다.
"푸닭커리 사장님, 언제 한번 우리 가게에 커피 한잔 하시러 오이소. 제가 맛있게 커피 뽑아드릴게예. 하하"
박서진씨가 현식에게 말하자 현식이 대답했다.
"네. 저희 가게에 사장님은 자주 오시는데, 저는 그러질 못했네요. 꼭 가겠습니다. 하하. 커피숍 이름이 핌... 핌.."
핌.. 뭐였는데, 현식의 혀끝에서 자꾸 말이 멤돌았다. 그러자 서진이
"'핌 머그레'입니다. 가게 이름 어렵지예? 허헛"
"아! 맞다. 핌 머그레... 죄송합니다. 갑자기 생각하려니 떠오르질 않았네요. 허허 근데 외국어인가봐요? 핌 머그레.."
라고 현식이 말하자 이번엔 수현이 대답했다.
"오호호호, 처음에는 그렇게 생각하시는 분이 많죠. 근데 외국어가 아니라, 옛날에 우리 아들이 애기 때 어른들이 커피 마시는 거 보고는 자기도 커피 먹고 싶은지 [나두 나두 커피 먹을래.]라고 말해야 하는 걸 잘못 말해서 [나두 나두 크핌 머그레.]라고 발음한 거예요. 그 말이 너무 귀여워서 가게 이름을 전에 쓰던 이름에서 바꿔봤어요. 그 전에는 장사가 잘 안되어서 가게 이름에 문제가 있나.. 그랬거든요. 그 때 가게 이름이 '꽃님 커피'였어요. 근데 '핌 머그레'로 가게 이름도 바꾸고 인테리어도 블랙, 브라운 위주로 바꾼 이후로 거짓말처럼 매출이 올라가는 거 있죠? 신기하더라고요. 우리 아들이 우리한테 복을 준 것 같아요. 호홋"
이번엔 다시 서진이 말을 이어갔다.
"참.. 그라고(그리고) 우리 가게에 오시믄 독서 토론이나 좋은 동영상 강의 나눔하는 멤버들도 정기적으로 모여서 지식 나눔도 하고, 지역 발전, 봉사 활동도 하고 그러거든예. 우리 지역에서 꽤 성공하신 분들도 많이 오십니더. 그래서 그 분들은 우리 가게를 '연구소'라고도 불러예. 오시믄 좋은 인맥도 많이 쌓으실 수 있으니까 꼭 한번 오이소. 제가 모임날이랑 시간은 나중에 알려드릴게예."
"앗. 그렇군요. 사장님 가게가 그런 곳인 줄 몰랐네요. 허헛 좋은 사실 알려줘서 감사합니다. (꾸벅)"
사회적 성공에서 대인관계는 매우 중요하다. 아니 매우 중요한 정도가 아니라, 절대적이다. 어차피 성공이란 사람들 사이에서 할 수 있는 것 아니겠는가? 지구 상에 인류는 자기 혼자만 있다고 치자. 그런데 자기 밖에 없는데 "나는 성공했다!"라고 아무리 외쳐봐야 누가 알아주겠는가? 동식물이 알아주겠는가?
실제 미국 콜롬비아 대학 MBA 과정에서 기업 CEO들을 대상으로 ‘당신의 성공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요인이 무엇인가’를 조사했는데, 응답자의 93%가 ‘대인관계의 매너’를 꼽았으며, 나머지 7%만이 실력이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그리고, 성공학자인 시비 케라는 성공의 85%는 대인관계에 달렸다고 말했고, 행복학자인 포웰 역시도 행복의 85%가 원만한 대인관계에 달렸다고 말했다. 성공이든 행복이든 가장 큰 것은 대인관계에 달려있는 것이다. 물론 훌륭한 사람들과 대인관계를 원활히 하기 위해서는 우선 자기 자신이 그 역량을 갖추어야 하는 부분도 있겠지만, 근묵자흑(近墨者黑) 이라는 말도 있는 것처럼 인격적으로든 지식으로든 훌륭하고 배울 점이 있는 사람들과 교류하는 것 역시 매우 중요하다. 인간은 원래 환경의 영향을 많이 받는 동물인지라, 그런 사람들과 어울리면 자기 자신도 그들처럼 변해가는 부분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우선 현재 자기 앞에, 옆에 있는 사람들을 원만하게, 그리고 바르게 대해야 한다. 그래야 나중에 더 큰 사람들을 만나서도 사람을 바르게 대하는 연습이 충분히 되어있기에 올바른 방법으로 대할 수 있는 법이다. 왜 자기 현재 앞에 있는 사람은 훌륭하지 못하고 초라할까? 한심할까? 불평하지 마라. 지금의 인연을 소중히 대하지 못한다면 더 나은 인연들이란 있을 수 없다.
어쨌든 훌륭한 사람들을 많이 사귈 수 있는 기회가 있음에 현식은 감사해하며, 서진의 가족과 헤어지고 맛있는 반찬거리를 사러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피카춥스 딸기크림맛 사는 것도 잊지 않았다. 나리는 왁자지껄한 시골 장터같은 분위기가 너무 정겹다고 여기 내려온게 후회가 안된다고 좋아했고, 효미도 이런 풍경이 신기한 듯 여기저기 구경했다. 그러다가 어느 할머니가 박스에 넣고 어린 강아지들을 팔고 있는 모습에 꽂혔는지 아빠 현식의 손을 잡고 거기로 이끌었다.
"아빠, 얘들 너무 귀엽다."
품종은 알 수가 없었지만, 생후 2달~3달 이내 정도로 보이는 귀여운 강아지들이 4~5마리 박스 안에 있었다. 아직 너무 어려서 만지면 터질 것만 같았다.
'이것이 말로만 듣던 견종인 [시고르자브종]인가?'라고 생각하고 있던 나리는 효미에게
"우리 한 마리 키울까?"
라고 말했다. 그러자 효미는 눈에서 갑자기 빛을 발사하면서
"응! 나 얘로 키울래!"
라고 이미 마음을 굳힌 것처럼 흰털에 갈색 얼룩이 있는 아기 강아지를 콕 집어서 말했다.
현식도 아직 타향에 와서 친구가 많이 없을 효미에게 강아지는 정서상 좋을 것 같아서 (사실 효미는 그 활발하고 밝은 성격으로 유치원에서 친구 많이 사귀어놓았지만, 현식은 그걸 모르고 있었다.) 반대하지 않았다. 집 안에서 개 키우는 걸 현식은싫어했지만, 현재 이사 온 집은 작지만 마당도 있었기에 좀 크면 마당에서 키울 생각으로 '오케이'하였다.
나리가 할머니에게
"강아지 한 마리, 얼마예요?"
라고 묻자 할머니는
"1만원만 주이소. 야들은 다 커도 30cm? 40cm 쯤? 많이 안 크고, 애미도 얌전해서 야들도 안 시끄럽고 얌전할 끼라예. 야는 보자...(효미가 고른 강아지를 번쩍 들어 배부분을 보면서) 남자네.. 홀홀홀. 아가야. 강아지 잘 키우그레이~"
라고 말했다. 나리는 지갑에서 1만원 지폐를 꺼내서 할머니께 드렸다. 효미는 강아지를 자기 품 안에 꼭 껴안았다. 그리고 강아지에게
"네 이름은 이제 '다행이'야."
라고 말했다. 이렇게 푸닭커리에는 '다행이'라는 강아지 식구가 생겼다. 다행이의 주인이 치킨집을 하는 관계로 앞으로 닭고기는 실컷 먹을 것이었기 때문에 다행이에게는 다행이었다. ㅎ
-------------------------------에필로그----------------------
아까 효미네랑 헤어진 서진의 가족들... 집으로 걸어가다가 그 초3 아들 호준이가 엄마 수현에게 말했다.
"엄마~~"
"왜 그래? 아들~"
"아까 그 여자애가 치킨 가게 딸 맞지?"
"응. 근데?"
"아... 아니야.. 그냥 물어봤어."
라고 호준이는 말하면서 얼굴이 발그레~하게 되었다.
엄마 수현은 그런 아들을 보면서 피식 웃었다.
"너 걔한테 관심있구나?"
"아.. 아냐.. 그런 거!"
"하여간 이 집 남자들은 다들 예쁜 여자 보는 눈은 있어가지구~ 크큭"
그러자 수현의 남편 서진이 한마디 했다.
"나도 잘 생겼..."
"응? 뭐라구? 거울 보여줘?"
수현이 서진의 말을 자르면서 들어왔다.
"난 거울이 체질에 안 맞아서 싫다~"
라고 서진이 말했다.
"자기야아~ 거울에 체질이 있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읭?"
이라고 수현이 말하자 서진은 지지 않고
"여보야아~ 집에 가는 동안 자~알 생각해봐라. 말이 될끼다. 아마."
라고 받아쳤다.
수현과 호준은 서진의 그 말이 어이가 없어서 깔깔깔 웃었다.
현식이네도 서진이네도 모두 행복한 어느 이른 밤이었다.
-이 글을 읽어주신 분들께 축복과 행복이 깃들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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