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식은 아이들과 함께 치킨을 먹으면서 재미있게 놀아줬다. 효미 또래 정도 애들이 많아서 효미랑 놀듯이 놀아줬을 뿐인데, 아이들이 그런 현식에게 뭔지 모를 정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런 현식의 모습을 힐끔힐끔 보는 척 했지만 사실은 유심히 관찰하고 있던 소영은 현식의 그러한 모습에 점차 호감을 느꼈다.
지금은 불경기라 좋은 직장에 취직 못하고 있지만, 대학도 나름 좋은 대학을 나왔고, 인물도 꽤 이쁜 축에 속했던 나리가 분명 곧 좋은 직장에 취업해서 좋은 곳에 시집 갈 것이라고 기대했던 소영에게 현식은 분명 달갑지 않은 사람이었지만 보면 볼수록 괜찮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왜 내 딸이 저런 애까지 있는 홀애비한테 시집 가야 된단 말인가?'라는 생각은 아직 떨쳐낼 수 없는 소영이었다.
봉사활동이 끝나고 쓰레기 등을 정리하는 도중 나리 엄마 소영이 현식에게 물었다.
"근데, 원래 봉사활동에 관심 많으셨어요?"
현식이 잠시 생각하다가 말했다.
"사실 나리에게서 어머님이 봉사활동에 관심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저도 예전부터 돈을 많이 벌어서 사회적으로 성공이라는 걸 하면 꼭 제가 사회로부터 받은 것에 대해 은혜를 갚고 싶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요. 제가 돈을 번 것은 저 혼자 죽자고 노력해서 된 것도, 제가 혼자 잘나서 그런 것도 아니라는 걸 잘 알고 있습니다. 주변의 수많은 분들이 제 사업 아이템을 알아주시고 사랑해주셔서 그렇게 된 것일테니까요. 뿐만 아니라 저를 여태 도와준 알바생들, 성실히 정직하게 사업하시는 거래처분들 등 모든 분들이 저를 직간접적으로 도와주신 분들의 공헌에 대하여 늘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마침 나리 어머님께서 이렇게 훌륭한 일을 하고 계시다는 걸 알고는 봉사활동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해봤습니다.
성공한 후로 미룰 게 아니라 지금 당장이라도 할 수 있는 것부터라도 하는 것이 맞다고 생각했습니다. 지금 당장 못하는 일은 내일도 모레도 먼 미래에도 못할 것이 뻔하다는 결론을 내렸거든요."
소영이 말했다.
"아.. 그래요? (생각은 나름 깊은 사람이네.) 근데 단도직입적으로 말할게요. 솔직히 내 딸을 아저씨한테 보내는 거 난 반대에요. 내가 이기적이라고 생각할수도 있는데 난 내 딸을 좋은 집에 자기 나이에 맞는 남자와 결혼시키고 싶어요. 이해하죠?"
현식이 침을 한번 꿀꺽 삼기고 대답했다.
"네, 어머님의 생각 충분히 이해합니다. 하지만, 저만 나리를 좋아하는 것이 아니라 나리 역시 저를 정말 좋아하고 있습니다. 제 딸인 효미도 나리를 무척 잘 따르고요. 사실 저도 나리가 너에게 참말로 과분한 여자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나리가 저를 좋아해주는 것에 대하여 하루에도 수십번씩 고마운 마음이 솟아오릅니다. 저는 제가 받은 은혜에 대해서는 죽어도 갚는 놈입니다. 그러니 그런 나리의 마음을 배반하는 행동은 절대 하지 않을 겁니다. 제 일생 마지막 사랑이 나리라는 결심으로 나리를 아끼고 사랑하겠습니다. 그러니, 한번만 진지하게 저에 대하여 편견 없이 생각해주십시오."
현식은 진지하고 공손한 저음톤으로 말하고 말이 끝나고는 소영에게 허리를 꾸벅 숙여 부탁했다.
소영은 곰곰히 생각해보았다. 세상에 어차피 흠이 단 하나도 없는 사람은 없다. 사실 아무리 좋은 집안이라고 해도 알지 못하는 흠결이 있을 수도 있고, 당장은 맘에 드는 사윗감도 겪고 보니 성격파탄자일수도 있는 노릇이었다. 그런 면에서 현식과는 오랫동안 한 동네에서 살면서 그에 대해 어느 정도 잘 알고 있었기에 그런 돌발 변수가 나올 가능성은 그리 없어 보였다. 하긴 요즘 세상에 결혼 한 번 한 과거는 흠도 아니라더라. 살짝 생각의 각도를 바꾸고 나니 현식도 그리 부정적으로 보이지는 않았다.
장고 끝에 소영이 다시 말했다.
"네.. 뭐... 좋아요. 생각 정도는 해보죠. 그렇다고 그게 긍정적인 생각일 거라고는 확신하지 마세요. 그리고 하나 더 물어볼게요. 나리가 나중에 자기 꿈을 위해서 공부를 더 하고 싶다거나 하면 협조해 줄 수 있나요?"
현식이 밝게 웃으며 말했다.
"네! 물론입니다. 아직 나리와 그런 말은 안했지만, 저 혼자서 늘 생각하고 있었던 부분이기도 합니다. 나리가 그냥 평범한 알바생이었을 때부터 나리의 학력이 아깝다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처음 나리 이력서를 보고 깜짝 놀랐어요. 저와 같은 대학교를 나왔더라고요. 그러고 보니 제가 아직 나리에게 자기 대학 선배라는 소리는 안했네요. (혼잣말로, 왜 안했지? 진짜?) 어쨌든 전공은 달랐는데 우리 학교 정도면 꽤 좋은 학교입니다. 그런 나리가 자기 전공을 살리고 싶다고 한다면 제가 할 수 있는 후원, 응원 다 할 생각입니다. 전공이 아니라 새로운 꿈이 생겼다고 해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건 제가 각서를 쓰라고 하시면 당장이라도 그럴 수 있습니다."
메라비언의 법칙(The Law of Mehrabian)에 따르면, 의사소통에서는 비언어적 표현이 90%를 상회하는 꽤 많은 비중을 차지한다고 한다. 상대방에게 메시지를 전달할 때 영향을 미치는 요소들을 따져보면 말의 내용 그러니까 메시지 그 자체는 겨우 7%를 차지하고, 목소리톤이나 말투같은 청각적 요소가 38%를 차지하며, 시각적 요소(바디랭귀지)가 55%를 차지한다고 한다. 그 시각적 요소 55%는 표정 35%, 태도 20%로 다시 나눌 수 있다.
여튼 현식의 말 내용도 훌륭했지만, 확신에 찬 말투와 진지한 표정은 소영의 마음을 움직이기에 충분했다. 소영도 이렇게까지 결의에 찬 사람을 본 적은 오랜만이었다.
26년 전 소영의 친정 엄마 아빠에게 물벼락에 김치.. 아니 그냥 싸대기까지 맞아도 물러서지 않고 '따님을 주십시오.'를 몇번이고 외쳤던 두만의 모습이 오버랩 되었다. 그 때 장면이 떠올라서 피식 웃을 뻔 한 걸 소영은 겨우 참았다.
두만이 소영의 엄마한테 물벼락 맞아서 머리카락 다 젖은 상태에서 아빠한테 싸대기까지 맞았는데, 그 여파로 두만의 머리카락이 물방울을 튀기며 공중에서 찰랑거였던, 바로 그 모습이 왜 그렇게 멋있어 보였던지... 그 땐 꼭 자기와 두만이 영화 속 주인공들 같았다. 물론 빌런 역은 엄마, 아빠가 맡았다.
그 땐 두만이 서울 바닥에서 알아주는 폭주 레전드 중 한명이었는데, 그 땐 수사자처럼 머리숱도 풍성했는데... 그 땐 소영 자신도 빨간 생머리 찰랑거리며 한 미모 뽐내고 다녔는데.. 자꾸 [그 땐 ~ 했었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오른다.
어쨌든 지금은 머리숱이 많이 사라진 두만은 가끔 소영에게 이런 농담을 한다.
"그 때 내가 장모님한테 물바가지 세례 맞은 이후로 머리카락이 슬슬 로그아웃 하기 시작했다니까. 그 물에 혹시 제모제 타셨던 거 아니야?"
현식은 소영의 입이 잠깐 움찔 웃는 표정을 짓다 말았던 순간을 놓치지 않았다.
"어! 어머님. 방금 웃으셨죠? 저 일단 70점은 받은 겁니까?"
현식이 헤헤 웃는 표정을 지으며 소영에게 말하자 소영이 어이가 없는 것 반, 아까 참았던 웃음의 여파 반으로 해서 푸풉!하고 웃고 말했다.
"70점은 무슨.. 푸풉. 어험~! 어쨌든 오늘은 수고 많았어요. 그럼 다음에 봐요."
그 때 그 오지랖 아주머님이 다른 아주머님과 오셔서 말했다.
"치킨 사장님, 뒷풀이 같이 갈래요? 우리 같이 뒷풀이 갈건데.."
아! 뒷풀이! 이런 좋은 기회가!!! 현식이 말했다.
"그럼 저희 가게에서 뒷풀이 어떠세요? 별로 멀지 않거든요. 오늘 치킨은 많이들 드셨으니 골뱅이 소면이랑 황태 구이 대접해 드리겠습니다. 그것도 우리 가게에서 하는 메뉴거든요. 치킨 더 드시고 싶으면 치킨도 더 올리고요. 저희 가게 500잔은 히야시 제대로 해서 진짜 시원해요."
아주머님들이 꺅~! 하고 좋아하셨다. 소영만 살짝 좀 뻘쭘한 표정을 지었다. '이 인간이랑 하루종일 보겠네.'라는 표정이라고나 할까?
아주머님들의 열화와 같은 성원에 힘입어 푸닭커리로 Go~!하고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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